김 수 정

어제부터 젖이 말랐다. 간신히 목숨 줄을 쥐고 있던 아이가 나오지 않는 빈 젖을 빨다 얼굴이 새빨개져 울었다. 아무리 빨아도 입안은 빈공기만 가득했고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에 본능적으로 나머지 젖을 움켜쥐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어미와 눈을 마주치며 애써보지만 더는 너를 위해 내어줄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슬픈 답을 들어야 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처음 겪는 당황함은 발악으로 바뀌더니 이내 기진맥진한 작은 몸이 축 늘어졌다. 울다 지쳐 잠든 얼굴은 말라붙은 눈물로 꼬질꼬질했다. 멍하니 아이를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니 병원에 있는 남편에게 가야 할 시간이 한참 넘어있었다

오토바이로 배달 일을 하던 사람이 둘째를 낳고 일주일 만에 교통사고가 났다. 늦은 밤 배달을 하러 가던 중에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 못해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세상천지에 오직 우리 둘만 의지하고 살아온 터라 도움을 청할 곳도 없고 병간호를 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제 막 살기 위해 호흡을 시작한 핏덩이를 안고 네 살 된 큰아이의 손을 잡고 하루에 몇 번씩 병원을 가야 했다. 산후조리를 해도 모자랄 몸으로 무리를 하니 하나씩 눈에 띄게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다리가 부어올라 손으로 살을 누르면 깊숙이 들어가 한참을 안 나오고 푹 파였다. 아기를 안고 다니려고 어깨띠를 했더니 저녁만 되면 양어깨가 화끈거리고 쑤셨다. 뼈마디는 욱신거리고 허리는 바로 누우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프더니 기어이 아이가 먹을 젖까지 말려버렸다. 빠져나갈 틈이 없는 완벽한 올가미처럼 모든 것이 절망에 맞춘 프로그램이었다. 신은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하지만 정확히 신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그러니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한꺼번에 정신 차릴 틈 없이 무차별적으로 쏟아부었다. 빠져나가기 힘든 미로에 들어선 삶은 마주치는 길마다 아득히 높은 벽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누가 보아도 불쌍한 남녀의 가난한 소꿉놀이였다. 유일한 재산은 젊음 하나였고 가진 것은 부엌문도 없는 사글셋방 한 칸이 전부였다. 여름이면 창문도 없는 방에 지긋지긋한 더위가 모기를 동반한 손님이었고 겨울이면 휘몰아치는 바람이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방문을 흔들었다. 가난한 사랑은 하루가 다르게 천장에 거미줄을 쳤고 벽지를 뚫고 뛰쳐나온 곰팡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며 살림살이마다 푸르게 내려앉았다.

먼지뿐인 통장을 끌어안고 아이의 배고픔 하나 해결하지 못한 어미의 타들어 가는 속은 시커먼 숯덩이로 변했다. 마른 젖을 그래도 돌려보겠다고 누린내 나는 돼지 족을 삶아 헛구역질을 하며 먹어도 퉁퉁 불어 터진 미역국을 입이 미어터지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등에 달라붙은 배로 이제는 울 힘도 없어 헐떡이는 아이는 조그만 입술을 오므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이 흐른다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이었을까! 심장을 누가 움켜쥔 듯 아리고 온몸에 아픔이 흘러 숨이 막히고 아팠다. 당장 아이를 먹일 분유를 살 돈이 없었다. 병원에 있는 남편을 찾아갈 버스비가 없었다. 쌀통은 바닥을 드러냈고 생활은 밑바닥이 되었다. 기막힌 하루를 앞에 두고 많은 고민을 했고 결론은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엄마다.’ 라고 말할 것이다. 분유 회사 세 곳에 편지를 보냈다. 부끄러운 내 모습은 문제가 안 되었다. 그저 아이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마트에 가서 분유를 훔치는 안타까운 주인공만 아니면 충분했다. 간절한 마음이 몇 장의 편지로 다 전달이 되지 않겠지만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 어떤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아이가 굶고 있다고 말하면 당장 퇴원해 일하러 가리란 걸 알기에 아픔을 나누지 않았다. 피 말리는 시간을 버티며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간절함이었다.

영웅은 가장 어려울 때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고 큰 희망을 주는 존재임을 영화에서 보았다. 슈퍼맨이 그랬고 배트맨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우리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을 갖춘 특별한 그들이 보여주는 영웅의 이야기는 현실 불가능한 상상의 부산물이기에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영웅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만나기를 청했다.

"편지를 보고 전화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아이에게 이유식 샘플 한 박스를 전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편지를 보낸 세 곳 중에 분유를 만드는 두 곳은 연락이 안 왔는데 이유식을 만드는 회사에서 분유가 아니라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이가 클 때까지 매달 한 박스의 이유식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잘 키우라는 격려도 그 분을 통해 전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냥 이것은 분명 기적이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나를 구하기 위해 어디선가 나타난 영웅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되었다.

매월 말일이 오면 영웅은 어깨에 커다란 박스를 메고 씩씩한 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아이의 목숨 줄을 구한 당신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아이의 든든한 키다리아저씨가 되었다.

봄이면 봄바람을 타고 여름이면 장맛비를 안고, 가을이면 가을바람과 함께 겨울이면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일 년을 빠짐없이 찾아왔다. 영화처럼 위대하지도 하늘을 날지도 손에서 거미줄을 날리지도 못하지만, 그저 흔히 보는 평범한 아저씨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영웅이었다. 이유식의 도움으로 포동포동 살이 붙고 까르르 웃고 한 걸음씩 걸음마를 시작하고 엄마라고 두 팔을 벌려 다가오는 행복을 받았으니 더 는 욕심이었다.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힘을 냈다. 어미젖을 못 먹고 분유도 못 먹고 이유식을 먹고 큰 아이가 스물세 살이 되었다. 영웅이 준 이유식의 결과물인지 신기하게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목소리 큰 아가씨로 자랐다.

언젠가는 꼭 만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이야기하며 가끔 말일에 찾아온 영웅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삶이 지나치게 흔들리는 날은 일상이 눈물 나게 아픈 날은 더 어려웠던 시절에 나를 찾은 영웅을 떠올려 본다. 가슴 따스한 젊은 날의 아련한 그리움이 나이를 먹으니 더 그립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의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