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신 혜

그럴 때가 있다. 원하지도,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았는데 인생이 만들어 놓은 진창에 발이 빠질 때. 부모님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돌아가셨을 때가 그랬다. 갓 백일이 된 동생과 나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진창에 처박힌 것이다.

그런 우리 남매를 구한 건, 스물둘의 새파란 고모였다. 차마 어린 나와 동생을 고아원에 보낼 수 없던 고모는 우리 남매의 엄마가 되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고모를 엄마라 불렀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은 원래부터 고모를 엄마인줄 알고 자랐다.

그 구조작전을 통해 우리 남매는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엄마가 된 고모는 내 또래의 부모님들보다 훨씬 젊었다. 소풍에 따라온 고모를 보며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나는 그저 젊은 엄마를 가진 평범한 아이로 보였다. 평탄한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엄마와 나는 점점 자라는 동생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고모는 진짜 엄마고, 아빠는 미국에 돈 벌러 갔다는 말을 동생은 철석같이 믿었다. 어리석게도 그때는 그게 동생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가슴 아픈 지난 일을 알아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동생이 의혹을 가질만한 일이 생기면 엄마와 나는 은밀히 눈빛을 교환하며 어물거렸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동생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결국 진실이 밝혀졌다. 녀석은 성난 짐승처럼 밤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싸움을 하거나, 오토바이를 훔치는 바람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잔혹한 방황의 길을 걷던 동생은 아무 언질도 없이 가출을 해버렸다. 밤늦게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감옥에 갈 만큼 나쁜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애가 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이 급성신부전으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고 했다. 몇달 만에 만나는 동생의 모습은 처참했다.

투석을 시작했지만 숨이 막히는 증상 때문에 제대로 눕지도 못했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가면 앓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신우염을 앓는 내 신장은 쓸모가 없었다. 고통스러워 하는 동생을 보다 못한 엄마가 이식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작년에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은 엄마가 안타까웠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당장 수술비를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데 동생이 반기를 들었다. 엄마한테서 신장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고, 수술비도 문제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없는 형편에 빚까지 질 셈이냐고 동생은 도리어 나를 질타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터덜터덜 걷다가 하늘을 향해 구조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을 흔들었다. 알고 있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손짓을 했다. 우리 여기 있다고. 제발 좀 구해달라고. 턱밑으로 물이 차오르는 것 같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내 구조신호가 통한 것일까. 기적처럼 돈이 모아졌다. 엄마가 장사를 하던 시장에서 모금을 한 것이었다. 여자 혼자 몸으로 어린 조카들을 자식 삼아 키우는 엄마를 시장 사람들은 모두 돕고 싶어했다. 마른 논바닥처럼 타들어가던 마음에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통장을 들고 동생에게 뛰어갔다. 엄마와 시장 이모들이 너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데 그냥 죽을 거냐고. 처녀 몸으로 우리 남매를 거둔 엄마한테 은혜를 갚기는커녕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제대로 안 하고 그대로 죽어 버릴 거냐고. 살아서 받은 만큼 갚고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굵은 눈물을 흘릴 뿐, 고집을 꺾지 않던 녀석을 구조 한 건 이번에도 엄마였다.

엄마는 그 날로 곡기를 딱 끊으셨다. 아들을 먼저 앞세우고는 하루도 더 살 수 없다고 하셨다. 같이 밥을 굶던 동생이 결국은 항복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은 채, 입술이 꺼멓게 타들어간 엄마를 더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하던 날, 보호자 대기실에서 나는 제발 더는 누구도 내 곁에서 데려가지 말라고 빌고 또 빌었다.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서야 두 사람이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왔다. 거부반응과 합병증 여부가 남아 있지만 수술은 성공적이라는 집도의의 말을 듣자,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동생은 훨씬 어른이 되어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힘든 치료를 받으면서도 면회 때 마다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동생이 안정적으로 버티자, 엄마도 기운을 차리기 위해 애를쓰셨다. 큰 수술을 이겨내고 신장을 나눠 가진 두 사람이 자랑스러워 고된 병원생활도 즐겁기만 했다.

퇴원 후, 동생은 다시 엄마를 엄마라 부르며, 가게 일을 도맡아 도와주는 착한 아들로 돌아왔다. 엄마 역시 그 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버리셨는지 훨씬 안색이 밝아지셨다.

우리는 평범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소중한 가족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허우적거리던 우리를 구해준 고모 엄마.

삶의 굽이굽이 도사리고 있던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막아준 우리 엄마

앞으로의 삶에도 진창은 찾아오겠지만 더이상 두렵지 않다. 세 식구가 함께 있는 한,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엄마가 매번 우리 남매의 영웅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 남매가 엄마를 지키는 굳건한 방패가 될 것이다.